광장의 응원봉처럼 반도체 노동자의 삶도 빛날까?
우리의 일상을 작동시키는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고 세대를 넘는 피해를 겪습니다. 이 산업은 누구를 위해 작동하며, 어떻게 하면 정의로운 산업이 될 수 있을까요?
주류 기술-미래 담론은 몇몇 부작용이나 윤리 문제만 해결한다면 웬만한 차이와 갈등은 과학기술로 해소할 수 있는 '하나의' 미래가 올것처럼 설파합니다. 그러나 어떤 미래를 상상할지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서로 갈등하고 경합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입장들을 드러내고 토론하고 조율하고 선택하는 일입니다. ... 결국 미래, 미래 예측, 미래 대비는 모두 정치적인 선택입니다. 미래에 대해 좀더 좋은 선택을 하려면 ... 미래상에도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전치형, 홍성욱, <미래는 오지 않는다> (문학과지성사, 2019)
광장의 응원봉처럼 반도체 노동자의 삶도 빛날까?
by 🤖아침
지난 겨울 탄핵 광장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꼽자면 ‘응원봉’의 불빛을 빼놓을 수 없겠죠. 저마다의 소중한 마음을 담은 LED 응원봉은 민주주의의 빛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탄핵광장에서 응원봉이 빛난 것처럼, LED 제조 노동자의 삶도 빛날까요?
4월 중순 진행된 포킹룸 2025에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의 “정의로운 반도체 산업은 가능한가 – 노동자 건강권과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토크를 듣고 왔습니다. 일상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이야기할 때는 무역전쟁이나 주식 같은, 어떻게 보면 탈물질화한 맥락에서 다루곤 하게 되는데요. 그보다 반도체의 물성과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다뤄보자는 기획자의 취지 설명과 함께 토크가 시작했습니다.
토크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많은 불의, 특히 노동자의 죽음과 반환경적 문제를 다뤘습니다.
1992년생으로 2015년 서울반도체 입사, 다다음 해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고 2019년 4월 8일 사망한 이가영 씨.

1985년생으로 2003년 삼성반도체 입사, 다다음 해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2007년 3월 6일 사망한 황유미 씨.

1987년생으로 2004년 삼성반도체 입사, 2007년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2010년 3월 31일 사망한 박지연 씨.

사망한 노동자 명단은 좀처럼 끝날 줄 모릅니다.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추모 달력을 보면, 거의 매주 누군가의 기일이나 추모일이 있습니다. 반올림이라는 단체 하나가 연대해온 반도체산업 분야 사망자만 이렇게 많습니다.
반도체 산업 노동자 피해와 반올림의 활동
반도체 공장 현장은 방사선 기기, 각종 유해 화학물질 등 위험요소가 많습니다. 터널증후군, 디스크 등의 질환 뿐만 아니라 화학물질 노출에 따른 유산 역시 반도체 노동자들의 흔한 경험이라고 해요. 하지만 일하다가 림프종이나 백혈병처럼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도 보상을 받기는 너무도 어렵습니다. 산업재해 인정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밀 유지가 철저한 반도체 공장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밝히기란 쉽지 않고, 특정 물질과 질병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은 컨설팅 회사를 활용해 오히려 연관성이 없다는 근거를 만들려 노력하기도 했고요. 오랫동안 산재 입증 책임은 오롯이 피해자인 노동자에 지워졌고, 피해자들은 ‘아픈 우리가 증거’라는 실존적인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반올림의 활동은 상당 부분 피해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과, 진상규명 추진 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08년부터 2024년 사이 180여 명이 반올림을 통해 산재 신청을 했습니다. 2017년 “첨단산업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산재 승인률이 개선되었으나, 윤석열 집권 이후에는 피해자 측의 입증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다시 하락하였다고 합니다.
또 관련 연구를 촉구한 끝에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6개 반도체 기업 근로자를 10년간 추적한 집단 역학조사를 진행, 2019년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조사 대상 20만 명 중 3,442명이 직업성 암에 걸렸고 그 중 1,178명이 사망했습니다. 일반국민 및 전체 근로자 대비 월등히 높은 비중입니다. 이렇듯 진상규명 측면에서 성과가 있었지만 클린룸 내 위험요인과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반도체 산업이 국가전략상 중요해지면서 기밀 보안이 한층 높아지고 증거 수집은 어려워지는 추세라고 해요.
오래된 피해, 하청 사슬
이같은 반도체 산업의 폐해는 한국에서만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원조, 실리콘밸리에서는 70-80년대 유독물질 노출에 따른 노동자 질병과 인근 지역 지하수 오염이 크게 문제가 되었고, 미국 기업 RCA의 대만 공장에서 비롯된 타오위안 지역 오염으로 대만 최초의 ‘영구오염지역’이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RCA 같은 기업이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기게 된 배경에는 바로 미국에서 발생한 환경오염과 각종 질병, 그리고 노동쟁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옮겨간 공장이 유사한 피해를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제조업 노동의 하청이 곧 피해의 하청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중요도 측면에서 대만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베트남 등지에 하청을 주고 있고, 그곳에서도 화학물질 탓에 또다른 피해가 발생하는 피해의 하청 사슬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설령 국내 대기업 클린룸이 안전해진들 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반도체는 클린룸 안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종 화학물질 및 부품을 필요로 하며, 이를 수급하는 복잡한 유통망은 영세 업장 및 해외/이주 노동자에 의존합니다. 하청의 단계가 멀어질 수록 안전장치 및 규제의 작동 또한 약해지겠죠.
반도체 산업은 전력을 많이 소모하고 온실가스 및 불소계 가스를 배출하여 기후위기 가속에도 기여합니다. 엄청난 속도의 생산과 소비 사이클 속에서 버려지는 전자쓰레기도 거대한 환경문제로 등극했죠. ‘무어의 법칙’의 또다른 면인 계획적 구식화planned obsolescence는 반도체 노동자의 피, 땀, 눈물과 같다고 반올림 이종란 활동가는 강조합니다.
반도체 산업이 유일한 길인가?
이 와중에 입법부에서는 반도체산업을 주 52시간 노동상한제에서 예외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반도체 특별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은 산업단지 조성에 600조원이라는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하고 환경규제를 완화하는 등 혜택을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정책 방향에는 반도체 산업 및 연관산업인 AI 산업 진흥을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지향점이 깔려 있을 겁니다.
반도체 산업의 톱니바퀴 속에서 피해를 입은 노동자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반올림은 묻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산업 투자는 자연 법칙이 아닙니다. 선택의 영역, 정치의 영역입니다. 더 많은 설비로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하면 누구에게 좋은 걸까요. 혹시 우리는 반도체 산업에 집착하여 다른 좋은 산업, 공동체를 더 풍성하게 하는 산업을 키울 기회를 걷어차는 것 아닐까요. 노동자와 환경을 해치는 특정 산업에 올인하는 대신, 인류공동체에 필요한 만큼 적정히 생산하는 산업 재편은 불가능할까요?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젊은 모색 2025>(4.24-10.12)에서 "산업혁명 시기의 직업병 문제가 오늘날의 전자 기술 산업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조명"하는 <섬섬옥수>(이은희 작)가 전시 중입니다.
-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4.30-5.9)에서 "반도체 산업 재해 피해자들의 업무 기록과 아카이브 자료를 따라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냄새와 물질의 작용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무색무취>(이은희 작)가 상영합니다.
- 외부 지원금 없이 운영된 <포킹룸 2025> 지원을 위한 자율 기부 안내 (페이지 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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