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모태신앙

스페이스X IPO를 보며 생각한 것들

기술 모태신앙
출처: 직접 찍은 사진
제가 제안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우주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다면 종교와도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기술과학의 가치관을 잘못된 신화의 산물로 폭로하고, 더 나은 가치관을 찾아야 합니다. 이윤보다 돌봄을, 소유권보다 조화를 중시하는 이야기를 찾아내고, 심지어 직접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주가 어떻게 우리에게 속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우주에 속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 말입니다.
—메리-제인 루벤스타인, <Astrotopia: The Dangerous Religion of the Corporate Space Race>

기술 모태신앙

2026년 6월 셋째 주
by 💂죠셉

모태신앙이라는 말 아시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기억나는 삶의 첫 순간부터 저는 언제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처음 제 의지로 신앙을 고백한 대학교 무렵을 그 시작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부모님의 의지로 유아 세례를 받아 교회에서 나고 자란 기억이 존재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 저는 모태신앙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의 20대 전체는 교회라는 무게 중심을 향해 끝없는 진자운동을 반복하는 괘종시계 같았습니다. 교회에서 일반 성도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은 거의 다 해본 것 같아요. 특히 대학 갈 무렵 시작한 교회 밴드의 경우 유럽 전체 한인 수련회까지 달려가 봉사를 했습니다. 매주 준비해야 하는 예배가 다섯 개였던 적도 있었는데, 제가 출석한 런던과 베를린의 한인 교회들은 대부분 자기 건물이 없어서 현지 교회 건물을 빌려 썼으므로 매주 밴드 연주에 필요한 중장비를 실어 나르고, 설치하고, 다시 풀어 창고에 집어넣어야 하는 일이 끝이 없었습니다. 그때 함께 일하고 밤늦게 둘러앉아 케밥을 나눠 먹으며 전우애(와 함께 내장지방을) 쌓은 얼굴들을 떠올려보면 다 추억이다 싶다가도, 어떻게 십수 년 동안 그 일을 계속했나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이제 교회를, 신앙을 아예 떠났습니다. 고생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과 실망 때문에. 그러니까 그 고생을 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교회라고 별로 다른 게 없어 떠났습니다. 별다를 게 없는 교회는 우리 사회의 소우주 같아서, 우리는 어쩌면 좀 더 늦게 마주해도 됐을 부조리에 집약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어른들은 편을 갈라 싸웠고, 돈 많고 목소리 큰 사람들이 상석에 앉았죠. 그런가 하면 교리와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사이 괴리감이 해소되지 않아서, 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에 실망해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교회는 대체로 이 모든 질문에 답하는 데 관심이 없었고요. 물론 드물게 예외도 있었지만.

가끔 생각합니다. 그런 교회에 왜 나는 계속 남아있었을까? 오로지 신을 향한 진실함 때문이었다면 그럴듯 하겠지만, 사실은 모태신앙의 관성이 아니었을까요. 사전을 찾아보니 관성은 “물체가 밖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등속도 운동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이라고 합니다. 움직이는 상태 뿐만 아니라 정지 상태도 관성이라는 겁니다. 같은 자리에 멈춰 있으려는, 변화하지 않으려는 힘 또한 힘이란 거죠. 평생 알고 지낸 익숙한 맛의 힘이 너무 세서, 마음 속 깊은 곳의 질문들을 오랜동안 외면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기술적 맹신, 실존적 거리두기

AI가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방식에 대해 ‘이건 한 번 더 생각해 보자’라는 목소리를 내는 게 업이 된 이후로 저는 제 모태신앙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21세기 문명사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은 온갖 기술로 뒤엉킨 환경 속에서 태어나 그것들이 주는 일상 속 효능감을 당연하게 여기며 삽니다. 관성적 신앙처럼, 많은 사람의 의식 구조 속에는 AI 같은 최첨단 기술에 대한 암묵적 믿음이 존재하지만, 가령 더 강력한 AI의 출현을 인류의 진보와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라든지, 안 쓰는 것보다 쓰는 게 무조건 좋다는 건 당연한 사실로 여겨지고, 질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믿음의 토대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더 나아가 우리 중 누군가는 그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들, 통칭 ‘비저너리’들을 별 거부감 없이 신뢰하는 걸 넘어 따라야 할 롤모델로 여깁니다. 그들이 만든 AI 서사 자체가 기독교 종말론과 매우 유사하다는 분석까지 있으니, 이 정도면 기술과 (특히 한국) 사회의 관계를 설명할 때 모태신앙이라는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종의 ‘기술 모태신앙’이랄까요.

윤리레터 구독자라면 책 구매로 이어지진 않을 거란 믿음으로 올립니다. 출처: 알라딘

지난주 스페이스X의 IPO 관련 기사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상 최대 규모의 IPO, 역사상 유례가 없는 조만장자(trillionaire) 탄생. ‘장기주의(Longtermism)’를 표방하며 끝없는 확장을 추구하는 자본의 욕망이 이제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향하는 걸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자칭 인류의 구원자인 저들이 정말 인류의 안녕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있을까요? 하지만 그들의 성공이 나 또한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 앞에서 중요한 질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혹은 최첨단 기술이 너무 복잡해지고 세분화되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미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마법’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이렇게 형성되고 강화되는 AI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단단해 보입니다. 가끔은 이런 글을 쓰는 저조차도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을 정도로요.

다시 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저의 모태신앙은 이후 한 번의 큰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코비드-19이 시작된 무렵, 당시 제가 살던 영국은 완전 봉쇄 조처가 내려져 외출이 금지됐고, 난생처음 ‘유튜브 예배’를 경험했는데요. 수백 명 군중의 열기와 음악 소리가 소거된 고요한 유튜브 화면, 낯선 교회 전경, 가끔 느린 와이파이로 인해 정지 상태인 목사님의 얼굴, 그리고 나의 신앙과 열심을 보여줄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된 방…. 그 속에서 책상 앞 꼿꼿했던 제 자세는 무너져 내려 침대로 옮겨갔다가, 급기야 어느 날은 잠에 들어 깨어나 보니 예배가 끝나있기도 했습니다. 종교가 없는 분들에겐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이 몇 달이 제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남들의 시선 속에서 행해온 헌신이, 실은 신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그저 익숙한 환경이 만들어낸 관성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저의 20대 전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상치 못했던 건, 이 낯선 흔들림이 가진 순기능이었습니다. 익숙했던 환경과의 낯선 물리적 거리두기가 이뤄지며 마음도 거리두기를 한 걸까요? 이 기간을 거치며 생긴 변화가 있었는데, 소위 ‘교회 언어’가 낯설게 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가끔 거울을 보다가 얼굴의 특정 부위, 예를 들어 귀의 생김새에만 한참 집중하다 다시 얼굴 전체를 바라보면 갑자기 그 귀가 무척 생뚱맞게 보일 때가 있는데, 마치 그런 느낌이었달까요. ‘은혜’, ‘성령의 불(?)’처럼 평생 당연하게 들어왔던 말들이 문득 생경하게 들렸습니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통용되던, 사실상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주문처럼 외우던 관용구들이 아니었나 싶었던 것이죠. 이 거리두기의 경험은 제 마음에 어떤 상흔을 남겼고, 다시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가능한 제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신앙을 말하고 담백하게 기도하려 애씁니다. 타인의 기준이나 예전의 제 모습에 비하면 덜 열성적일지 몰라도, 지금의 제 신앙과 이성은 훨씬 더 화목하다고 느낍니다.

잠재공간(latent space)

제 이야기로부터 건져 올릴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거리’의 중요성이 아닐까요. 기술 철학자인 랭던 위너(Langdon Winner)의 인식론적 기계 파괴주의 (Epistemological Luddism)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기술 철학자인 손화철의 말을 빌리자면, “삶의 형식이 되어버린 기술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해체해 보는 것 (...)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죠. 제가 여전히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거리두기를 통해 익숙했던 신앙을 낯선 것으로 만들고, 거기 어지럽게 뒤섞여있던 종교적 언어와 작별한 것처럼요. 

AI 윤리 레터를 쓰기 시작한 이후 지인들을 만나 ‘AI에 대한 대안적인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비슷한 반응을 마주합니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데 사람들이 그런 한가한 소리를 듣겠어?” 혹은 “너무 이상주의적인 생각 아니냐?”. 그런데 평생을 지탱해 온 확고한 종교적 신념이 낯선 흔들림 앞에서 재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공고한 ‘기술 모태신앙’을 성찰하는 일 역시 아주 불가능한 희망은 아닐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레터를 통해 비영리 단체 ‘잠재 공간’을 소개했습니다. 저희는 누군가 AI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믿음이 잠시 유보되고, 비판적 거리두기를 경험해 볼 수 있는‘안전한 공간’을 지어 가보고 싶습니다. 거대 테크 기업들이 주입하는 획일적인 기술 서사에서 벗어나 각자의 실존이 담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넓혀가고 싶습니다. 조만간 첫 번째 오프라인 모임 소식을 전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feedback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유머와 용기, 따뜻함이 담긴 생각을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남겨주신 의견은 추려내어 다음 AI 윤리 레터에서 함께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