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 효과일까 브뤼셀 장벽일까

EU가 정책 환경을 선도하는 '브뤼셀 효과'는 AI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지금도 지속될 수 있을까요?

브뤼셀 효과일까 브뤼셀 장벽일까
고대 그리스어에서 접두사 '디아dia–'는 '교차'를, '볼로스bolos'는 '던지다'를 뜻한다. 디아볼리즘diabolism, 즉 악마성은 경계를 넘어 던지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팀 잉골드 (김현우 옮김), <조응>

브뤼셀 효과일까 브뤼셀 장벽일까

by 🍊산디

미국은 군사력과 기술력으로, 중국은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대규모 투자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또 다른 주요 행위자, EU는 규제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독특한 전략을 펼치고 있죠.

U.S. dollar banknote with map
Photo by Christine Roy / Unsplash

EU는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를 염두에 두고 정책을 설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브뤼셀 효과는 EU가 정책 환경을 선도함으로써 전 세계 시장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EU의 포부이자 실제 현상입니다. 지난주에 소개드렸던 정당한 이익의 법리도 EU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인공지능 법을 논의에 자주 등장하는 위험기반 접근(risk-based approach)이 EU 인공지능 법(AI Act)을 토대로 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EU는 단일 유럽 시장을 달성하고 유럽의 소비자와 환경을 보호하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움직입니다. 1990년대 이래 수십 년간 상품과 서비스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단일 시장을 조성하고, 유럽 전역의 소비자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을 해왔죠. 이들은 전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하는 글로벌 기업에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blue flag on pole near building during daytime
Photo by Guillaume Périgois / Unsplash

아누 브래드퍼드(Anu Bradford)는 그의 저서에서 브뤼셀 효과가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 시장 규모: 유럽 시장은 규모 면에서 클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시장이기도 합니다. 다양성이 높고 구매력이 높을뿐더러, 영향력 있는 소비자가 많아 사업자가 실질적인 수요를 찾기 용이합니다.
  • 높은 규제 역량: EU 집행위원회는 높은 정책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학력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서 활동해 온 전문가들이 모여있다 보니 회원국 일반에 적용 가능한 정밀한 정책 설계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하네요. 유럽 집행위원회의 예산이 적다는 사실 또한 모든 역량을 규제에 쏟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엄격한 기준: 유럽 시민들의 소비자 및 환경 보호 요구로 인해 EU 규제 기준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EU는 만장일치가 아닌 가중 다수결(qualified majority)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규제 수준을 낮추지 않아도 새로운 규제를 다른 국가에게 설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고정된 정책 대상: EU의 규제 프레임은 소비자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즉, EU 소비자에게 상품 및 서비스를 판매하는 기업은 소재지와 무관하게 규제 대상이 됩니다. 이로써 규제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표준화를 통한 비용 절감: EU는 대규모의 법적, 기술적 표준화를 이룸으로써 기업이 EU의 규제를 준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줄입니다. 기업은 일단 EU의 규제를 따르면 EU 회원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규제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죠. 기업에게도 EU의 규제를 준수하는 것이 효율적인 전략일 수 있습니다.
red and white no smoking sign
Photo by Dim Hou / Unsplash

하지만 AI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지금, 브뤼셀 효과가 지속될 수 있을지 회의하게 되는 사례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메타는 멀티모달 AI 모델(가상 비서)을 EU 시장에 제공하지 않기로 하는가 하면, 애플은 아이폰15부터 장착되는 AI 기능인 ‘애플 인텔리전스’를 EU 시장에서는 서비스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런 결정은 부분적으로 EU AI 법의 범용AI모델(General Purpose AI, GPAI)에 대한 별도 규제에 근거합니다. AI 법은 GPAI 학습에 활용된 데이터의 목록을 공개하고 저작권자가 요청할 경우 해당 데이터를 학습 데이터셋에서 삭제하는 것, 적대적 테스트를 시행하는 것, 사건 발생 시 이를 추적하고 문서화할 것 등을 요구합니다. 디지털시장법(Digital Market Act, DMA)도 규제 장벽으로 거론됩니다. DMA의 상호호환성 규정을 준수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AI 기업들은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독자적인 AI 기술을 개발하고, 그것의 성능을 높여 최대의 이용자를 확보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안전성과 기업 정보 공유는 뒷순위에 있죠. 이런 와중에 EU의 규제를 준수하려면 기업은 적지 않은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만약 범용AI모델을 제공하는 빅테크가 EU 시장에 진출하게 되면

  • 다른 사업자와의 호환성을 위해 기술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야 하며,
  • 저작권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학습 데이터 리스트를 공개하고 삭제 요청에 대응해야 하고,
  • 규제기관에게 기업 경영과 AI 모델에 대한 정보들을 제출해야 하며,
  •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시 대대적인 조사, 언론 보도와 함께 AI 상품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가 낮아지고,
  • 적용되는 법에 따라 전 세계 매출액의 최대 7%~10%에 이르는 과징금을 내야 합니다.

기업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규제는 비용일 수 있고, 한정된 자원을 ‘경영자가 원하는 대로’ 배분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죠. 기업은 본래 수익을 좇습니다. 그러니 기업이 비겁하다는 비판보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정책 환경이 어떤 효과로 이어질지에 대한 판단입니다.

AI 기업들이 EU에 서비스를 출시하는 걸 꺼리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EU라도 EU 소비자가 없는 기업을 규제할 권한은 없습니다. 세계화를 향유했던 EU 브뤼셀 효과는 빠르게 블록화하는 오늘날에도 계속될 수 있을까요? 규제로 인해 EU 소비자의 후생이 저해되는 것은 아닐 것일까요? 혹은, 비유럽 국가 소비자들의 데이터로 ‘안전’해진 서비스를 EU가 체리피킹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요? EU를 피하는 기업들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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